미국에선 ‘000’만 없으면 살 만하다고 한다. 의료비다. 감기라도 걸려 병원에 한 번 다녀오려면 돈 십만원쯤은 각오해야 한다. 실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의료비 지출이 가장 많다. 2007년 1인당 7290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900만원 넘게 썼다.


한국에서도 ‘000’만 없으면 살기 괜찮다고 한다. 교육비다. 우리나라 교육열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히 사교육에 쏟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교육열은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작용이 너무 커 보인다. 자녀 교육에 ‘올인’하다 보니 부모들은 노후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쓸쓸한 말년을 걱정하는 처지에 놓였다.

더 큰 문제는 빈부격차에 이은 교육 불평등이 가난 대물림을 양산한다는 데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는 피할 수 없다. 기껏해야 절대빈곤층을 줄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각도로 빈부격차를 풀어내는 방법은 계층 간 이동이 원활한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최고이자 거의 유일한 방법이 ‘교육’이다.

과거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대가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도 학교 교육만 열심히 따라가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시절을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은 어떤가. 많은 통계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준다. 사교육비 격차가 곧 실력 차이다.

올 1~3월 소득 상위 20%와 하위 20%의 월평균 사교육비는 각각 71만원과 16만원으로 4배 넘게 벌어졌다. 이 사교육비 지출 격차는 95년 3.2배에서 꾸준히 상승세다. ‘투입비용’ 차이는 고스란히 수능 성적에 반영된다. 한국교육개발원 조사를 보면 대학 합격자 부모의 월평균 소득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246만원)→지방 4년제 대학(189만원)→전문대(146만원)→대학에 가지 않은 학생(131만원)’ 순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사교육비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들어간다. 과거엔 초·중등학교 때 뒤처져도 고등학교에서 만회할 기회가 있었다.

요즘 젊은 엄마들에게 “자녀를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시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간 적잖은 핀잔을 들을 것이다. 많은 학부형들이 ‘사교육으로 다져진 초교 4학년 때 실력을, 또 사교육으로 고3까지 끌고 가야 좋은 대학에 간다’고 믿는다. 그 돈이 도대체 얼마인가.

정부가 사교육을 뿌리 뽑겠다며 입시제도를 바꿀 때마다 사교육이 오히려 번성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다. 자식을 더 공부시키겠다는 부모의 ‘본성’에 역행해봐야 소용없다는 증거다.

기자는 가장 선행돼야 할 과제로 공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이 사명감을 갖는 일이라고 본다. 밤잠 안자고 연구하며 더 정성껏 가르치는 게 ‘가난의 대물림’을 해결하는 길이라는 소명의식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학원 선생보다 실력 없다는 평가도 그렇지만, 열정마저 떨어진다는 비난은 부끄럽지 않은가.

의료비라는 아킬레스건을 안고도 미국에는 이민자들이 몰려든다. 미국은 바닥인생도 뒤집을 수 있다는 꿈을 준다. 그것은 믿을 만한 공교육이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만 탄탄하게 받쳐준다면 대한민국은 미국 아니라 그 어느 나라도 부럽지 않은 곳이 될 것 같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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