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경기침체 ‘2년 이내에 해결된다’ 중론
◆ 미국경제 장기불황 오나? / 전문가 설문◆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이번 위기로 인해 과연 미국 경제가 침체에 들어가고 더불어 세계 경제 역시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가 경제계 최고 화두가 됐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결론적으로 현재의 위기는 ‘1~2년 안에 충분히 수습되고, 세계 경제침체는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불황 지속 기간
늦어도 2010년에는 회복

미국 경제와 관련한 최대 관심사는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문제로 촉발된 미국 경제 불황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다. 6명이 ‘1~2년 안에 충분히 수습된다’에 한 표를 던졌다.

반면 4명은 ‘장기화된다’에 동조한다. 그러나 장기화라 해도 5~10년쯤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4명 중 2명이 ‘장기라 해도 3년 정도’라고 부연설명을 달았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만이 “정책 대응 방식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여운을 남겼다. 결국 늦어도 2010년경이나 이후에는 다시 미국 경제가 회복세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도 될 성싶다.

다만 신현송 프린스턴대 교수는 “이번 경기침체는 전례 없는 유동성 확대를 기반으로 급등한 각종 자산가격 거품 붕괴가 원인인데 미국에서는 과거에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다. 따라서 그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또 “현재까지는 중동이나 아시아 국부 펀드들이 미국 금융기관에 대거 투자함으로써 미국 금융기관의 자기자본 충당에 한몫을 했지만, 벌써 이들은 지난해 가을 투자한 지분에 대해 손실을 보고 있고 따라서 앞으로는 훨씬 까다로운 투자기준을 세울 태세”라고 덧붙였다. 향후 추가적인 금융 기관 부실이 발생하면 바람막이가 없는 상태에서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경고다.

세계 경제 동반침체
디커플링 ‘No’ 동반침체도 ‘No’

미국 경제는 전 세계 경제를 좌우한다. 미국 경제가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7년 국내총생산(GDP) 기준 무려 26%에 달한다. 게다가 세계 경제의 대미 수출의존도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 2006년 기준 세계 경제의 대미 수출의존도는 17%다. 결국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지면 세계 경제 또한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번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예전엔 미국 경제가 기침을 하면 전 세계 경제가 독감에 걸릴 정도였지만 지금은 미국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는 나름대로 잘나갈 것이라는 ‘디커플링(잠깐용어 참조)’ 현상에 대한 기대감이 팽배하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디커플링까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로 가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10명 중 8명이 이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왜 디커플링까지는 아닐까.

아직까지는 미국 경제를 대체할 만한 경제 규모를 가진 국가가 없다는 점이 최고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소비시장은 95조달러에 달하는 반면 중국과 인도는 두 국가를 모두 합쳐봐야 15조달러에 불과하다. 미국 소비자를 대신할 새로운 기관차가 필요한데 아직까지는 그런 역할을 해줄 국가와 소비자가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로 가지 않는 것’은 예전에 비해 완충역할을 해줄 수 있는 국가가 크게 늘어난 덕분이다.

한편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전무와 이준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미주팀장은 “금융 부문과 실물 부문을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금융 부문에서는 완벽한 디커플링이 아직 어렵다. 미국 주가나 통화정책에 글로벌 주가가 연동될 수밖에 없다. 이미 금융 부문 위기는 세계적으로 전이됐다. 그러나 실물 부문에 있어서는 디커플링이 가능하다. 중국, 인도 등 신흥국은 물론이고 자원가격 상승으로 인해 중동,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남미의 자원부국들 성장세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반면 성태윤 연세대 교수와 이상재 현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경제침체에 따라 세계 경제도 침체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이상재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경제침체로 달러가치 약세가 지속되면 유럽과 일본 경제의 수출 여건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이들 선진국 경제가 안 좋아지면 이후로는 대선진국 수출 비중이 높은 중국을 비롯한 중화권의 경기침체가 올 것”이라며 세계 경제의 점차적인 침체를 점쳤다.

불황 해결 위한 조치
추가 감세 등 보완책 필요

어쨌든 미국 경제불황이 조속히 해결되는 것이 세계 경제를 위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국 경제불황이 빨리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3명의 전문가가 ‘잘하고 있다’고 답한 반면, 7명은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보완책이 필요할 것인가에 관련해서는 추가 감세, 공적자금 투입, 금리 인하 등이 거론된다.

김갑식 한국은행 구미경제팀장, 이남우 메릴린치증권 대표, 고유선 대우증권 이코노미스트 등이 모두 ‘추가 감세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추가적인 감세 조치를 주장하는 것은 감세 조치가 소비 진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김갑식 팀장은 추가 감세 외에 다양한 소비진작책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세금환급을 확대하는 것 외에 저소득자 등을 대상으로 모기지 대출 상환 부담 완화책과 소비심리 개선에 영향이 큰 고용개선을 위한 고용유인책 추진 등이 한꺼번에 이뤄져야 한다”는 게 김 팀장 생각이다.

물론 이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일명 쌍둥이적자라 불리는 미국의 재정, 무역적자가 다소 개선되고는 있다 하나 아직까지 미국의 재정적인 여력이 부족한 때문이다. 금리 인하 또한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재 미국 금리는 벌써 3%대인 데다가 인플레이션 우려로 인해 추가 금리 인하 결정이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공적자금 투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이는 신현송 교수다.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금융기관 부실이 문제의 근원일 때는 신속한 금융 자기자본 보충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 교수는 이와 관련 “단순히 이자율만 낮춘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공적자금을 이용한 자기자본 충당은 정치적인 결심이 필요하다. 아직 미국은 이 같은 위기의식이 없다. 2009년 선거가 끝난 이후나 올바른 인식이 서지 않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그런가하면 김경원 전무는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카드는 거의 다 나왔다. 결국 문제는 심리”라고 단언한다. “주택 가격에 대한 심리적 안정이 중요하다. 또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 카드론, 오토론, 상업용 부동산 대출 부실로까지 전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라는 게 김 전무가 제시하는 해법이다.

잠깐용어

◇디커플링:Decoupling. 커플링(Coupling)의 반대 개념. 한 나라 또는 일정 국가 경제가 인접한 다른 국가나 보편적인 세계 경제흐름과는 달리 독자적인 경제흐름을 보이는 현상을 가리킨다.

■설문에 참여해주신 분들 : 고유선 대우증권 이코노미스트 / 김갑식 한국은행 구미경제팀장 / 김경원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신현송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교수 / 이남우 메릴린치증권 대표 / 이상재 현대증권 이코노미스트 / 이준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미주팀장 / 전종우 SC제일은행 상무(가나다 순)

[특별취재팀 : 김소연(팀장) / 정광재 기자 / 명순영 기자 / 박수호 기자 / 김정혁 기자 / 정대용 미주한국일보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448호(08.03.26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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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러시아를 뚫어낸 개척 정신

모스크바 취재기간, 기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묵었다. 시내 호텔 하루 숙박료가 400달러쯤 한다. 살인적인 물가를 조금이라도 피해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L그룹 계열사 해외사업팀 4명이 함께 머물렀다. 기자의 출국 전날, 조촐한 환송 술자리를 마련해줬다. 보드카가 몇 잔 돌아가고 거나하게 취한 분위기. 말이 없던 이모 부장이 입을 연다. 그는 2004년부터 러시아를 ‘밥 먹듯’ 넘나들고 있었다. 한 달에 보름은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머무는 유랑생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싫어하겠다”고 물어봤다.

“가족, 중요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이 시장을 뚫어야 한다는 일념 하나뿐입니다. 한국 기업 발전이 곧 국익에 기여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 부장은 러시아에 들어올 때마다 뿌듯하다고 했다. 자동차, 가전, 스낵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제품이 늘어나서다. 잠자리가 불편하고 음식이 입맛에 안 맞지만, 러시아 건물 창호를 한국산으로 다 바꿔버리겠다는 포부 하나로 이곳에 온 그다.

모스크바 북쪽, 자동차로 3시간 거리에 자리 잡은 오리온 초코파이 공장에 가봤다. ‘뜨베리’라는 이곳은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다. 한국인이라고 해봤자 공장 주재원 8명과 선교사 1명이 전부. 한국 식당은 물론 없다. 기자는 공장에서 선교사가 직접 해준 간단한 백반 점심을 나눠 먹었다. 주재원들이 집을 제외하고 먹을 수 있는 유일한 한식인 셈이다. 이들의 생활이 어떠할지 짐작할 만했다.

러시아는 외국 기업이 뚫기 만만치 않은 시장이다. 배타적인 정서는 기본. 중국 못지않게 정부 인맥이 없으면 인허가도 어렵다. 시간관념이 없는 러시아인은 서두르는 법도 없다. 오죽하면 88년 러시아와 인연을 맺은 롯데가 20년 흐른 지난해에야 백화점 문을 열었을까.

생활환경도 척박하다. 매서운 추위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겨울이면 2주에 한 번쯤 해가 뜬다. 구름은 늘 끼어있고 날씨는 스산하다. 밤에 밖에 다니는 일도 피해야 한다. 고위 외교관 부인조차 지하철에서 구타당하는 나라다.

한 주재원은 자신은 세계 어디에 가도 상관없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러시아만큼은 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 가족을 한국에 남겨두거나 아예 다른 나라로 보낸 경우도 많다.

70년대 한국 건설노동자들이 대거 중동으로 건너갔다. 뜨거운 사막에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도 한국 기업인들은 러시아 등 오지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른다.

자원 없는 한국이 살 길은 세계 시장을 개척하는 것뿐이다. 이들이 바로 중동 산업역군의 대를 잇는 개척자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명순영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442호(08.02.6 · 13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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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러시아를 잡아라

좌우를 응시하는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수리.

러시아의 왕관과 휘장에 빠짐없이 보이는 문양이다. 비잔틴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를 상징하며 만들었다. 러시아인들은 15세기에 이를 들여와 ‘동양과 서양을 동시에 호령한다’는 뜻으로 재해석한다.

최근 러시아 경제를 보면 이런 의미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강력한 리더십과 풍부한 자원, 고유가라는 삼박자가 맞아떨어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힘 있게 끌고 가면서 최근 5년간 5~7%대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동서로 자리 잡은 유럽과 아시아를 따돌릴 기세다.

러시아의 발전은 우리에게도 분명 기회다. 1억5000만명의 내수시장이 열려서다. 한국 기업들은 70년대 중동 사막의 모래바람을 잠재웠던 개척정신으로 미지의 황금시장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대선을 앞두고 긴장된 분위기의 모스크바. 매경이코노미는 현장에서 러시아 경제의 빛과 어둠을 속속들이 들여다봤다.

■ 현장르포 "아파트 · 외제차 갖고 싶어요"

지난 13일 모스크바행 대한항공 923편. 만석(滿席)이다. 기자도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가 출국 하루 전에서야 겨우 자리를 얻었다. 경제가 번성하는 곳에 사람이 몰린다고 했다. 승객들로 꽉 찬 비행기. 러시아가 얼마나 역동적일까 기대감을 주기 충분했다.

세르메체보 국제공항 입국 심사장(Passport Control)에 도착하자마자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수속을 기다리는 행렬이 전혀 줄지 않는다. 한 사람당 처리하는 시간은 어림잡아 10분에서 15분. 1분 내외로 끝내는 한국과는 천양지차다.

전산시스템부터 문제다. 입국자 기록이 제대로 화면에 뜨지 않는 모양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모니터를 쭉 훑어보다 ‘기다리라(Just a moment)’고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진다.

화면에 뜨지 않으니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입국 대기자들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지만 공무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급할 게 없는 눈치다. 사회주의의 잔재인가.

비행기는 오후 8시에 도착했다. 기자가 공항을 빠져나온 시간은 오후 10시 30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이없어 하는 기자에게 마중 나온 민병구 오리온 러시아법인 인사총무팀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제가 본 기록은 6시간입니다. 이제 겨우 러시아에서 사업을 하기 위한 1단계를 밟으신 겁니다.”

주재원들은 이 같은 현실에 익숙하다. 마중 나올 때도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춰 차에 시동을 걸고 공항으로 향한다.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나라, 의욕이 없는 나라, 이런 곳에 경제 발전이 있을까. 첫인상은 이랬다.

■ 한 번에 몇 십만원 쇼핑 척척  

러시아는 느리다. 변화를 싫어한다. 그래서 늘 게으른 북극곰에 비유돼왔다. 그러나 이 굼뜬 나라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오일머니가 들어오고서부터다.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가 600억달러에 달한다. 주로 석유와 가스 수출로 벌어들였다. 최근 5년간 국내총생산(GDP)은 연간 4~7%. 러시아의 외환보유액은 4400억달러(2007년 10월 말 기준)로 세계 3위다. 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나라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러시아인들도 ‘돈맛’을 알기 시작했다. 국민 50% 이상이 성공지표로 “돈이 얼마나 있느냐”를 꼽는다. 모스크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쇼핑상가 ‘메가몰(Mega Mall)’에서 만난 뾰뜨로비치 타블로이나(35)에게 “올해 최대 관심사가 뭐냐”고 물었다. 잠깐 생각하더니 “잘사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의 바람은 중산층이 되고 싶다는 보통의 러시아인을 대변한다.

중산층의 조건은 세 가지다. 집, 외제차, 1년에 1회 정도로 가족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경제적·시간적 여유.

모스크바에 집이 없다면 정말 살기 힘들다. 월세가 살인적이다. 물가상승을 이끄는 대표적 요인이기도 하다.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세르게이 박(28)이 내는 월세는 월 1400달러. 그의 월급이 2500달러임을 감안하면 생활비의 절반 이상을 월세로 내는 셈이다. 집이 없는 모스크바인은 가계 소득의 70% 가까이를 집세에 쓴다. 이러니 집이 중산층의 기본 조건일 수밖에. 현지 한인 주재원들도 월평균 6000달러에 가까운 돈을 월세로 지불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동차도 중산층의 필수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4000달러면 한 대 사는 러시아산 라다(Lada)로는 중산층으로 대우받지 못한다. 외제차를 굴려야 한다. 러시아 차라면 적어도 두 대는 돼야 한다.

문화와 여가생활을 중시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여행을 떠나거나, 박물관을 구경할 수 있는 여유도 필수조건이다. 모스크바에서 이런 생활을 누리려면 월소득이 약 1000달러는 돼야 한다고.

현재 모스크바인 10명 중 7명 이상은 중산층이다. 또 중산층 가운데 20%가 월 4000달러 이상의 고액 임금자다. 옛 사회주의 시절 밴 습관 탓에 저축은 하지 않는다. 교육·의료비도 국가에서 상당부분 지원받는다.

급여 가운데 절반은 세금을 피해 현금으로 지급받는다. 통장에 찍힌 돈을 대부분 써버려도 실제 주머니는 여전히 많은 돈이 남아있다는 얘기다. 이를 ‘회색임금’이라고 부른다. 유통업체에 근무한다는 드미트리는 “자신이 받는 월 급여는 1500달러 수준이지만 명세서에는 700달러라고 적혀있다”고 했다. 실질 가처분 소득이 높다는 얘기다. 이런 중산층이 빠르게 늘고 있다. 러시아사회과학연구소에 따르면 지금과 같은 경제성장이 지속될 때 중산층의 인구 비중이 35%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돈이 풀리면서 인플레이션도 심해졌다. 지난해만 해도 10%가 뛰었다.

한국 식당의 경우 김밥 두 줄, 라면 한 그릇이 2만원(450루블)에 팔린다. 고물가 때문인지 중산층의 기대임금 수준도 높아진다.

전형적인 모스코비치(3대째 모스크바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 율리아 티크호느가보바(28)는 “모스크바에서 중산층으로 살려면 1년에 3만달러(약 2800만원)는 벌어야 한다”고 했다.

이제 러시아인들도 돈이라면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뜨베리 오리온 생산공장을 책임지는 박종섭 본부장은 “처음에는 9시부터 5시까지 정해진 시간에 일을 하려 했지만 지금은 시간 외 수당을 벌기 위해 주말 근무나,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 현대차 구입, 중산층으로 가는 첫걸음

중산층의 증가는 곧 소비로 이어졌다. 모스크바 시내는 이들을 겨냥한 세계 자동차 업체들의 치열한 각축장이 됐다. 1억원 넘게 줘야 하는 메르세데스벤츠, BMW, 포르쉐 등 명품 자동차들이 거리를 쌩쌩 달린다. 얼핏 봐도 러시아산 ‘라다’보다 많아 보인다.

모스크바 거리에서 눈에 많이 띄는 차는 한국차다. 현대·기아차는 이곳에서 대접받는 외제차다. 수입차 가운데 도요타를 제치고 판매대수 2위를 자랑한다.

강두식 현대자동차 러시아법인 마케팅 부장은 “현대차는 중산층으로 올라서는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PWC의 보고서에 따르면 “91년 소련 붕괴 이후 줄곧 증가세를 보여 왔지만 2006년 최고의 성장세를 보였다”며 “2010년에는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제치고 독일에 이어 2위의 자동차 판매시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모스크바 중심가 크레믈린궁 옆에 자리 잡은 러시아 최대 규모의 명품 백화점 굼(GUM)에 들어가봤다. 평일 오전 시간대라 꽉 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잖은 러시아인들이 쇼핑을 즐겼다. 한 젊은 여성이 지갑에서 얼마를 꺼내 계산하는지 유심히 들여다 봤다. 1만루블. 우리나라 돈으로 40만원이 넘는다.

모스크바 시내 노브이체료무시키의 고급 가전매장인 에떼도 분위기는 비슷하다. 삼성과 LG 텔레비전으로 가득한 이곳에서 화려하게 밍크코트로 차려 입은 중년 여성과 남편이 107㎝(42인치) 평판TV를 고르고 있다. 손에는 삼성전자의 최신 휴대폰이 들려있다. 1만4000루블, 한화로 55만원짜리다.

모스크바 젊음의 상징인 아르바트 거리.
모스크바 젊음의 상징인 아르바트에 들어선 스타벅스(2호점)에서 여유롭게 차를 즐기는 모스코비치들은 러시아 경제의 성장을 상징하는 듯도 했다.

■ 푸틴 대통령 인기 하늘 찌를 듯

2008년 가장 큰 관심사는 3월 대선이다. 푸틴 대통령의 지원을 받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가 후계자로 대통령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현지 분위기다.

대신 푸틴은 실세 총리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인지 선거가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도 아주 조용하다.

독재라는 비판이 나올 법도 하지만 푸틴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7명은 푸틴이 집권하기를 바란다. 기자가 만난 러시아인들 모두 푸틴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는 GDP를 두 배 가까이 늘렸다는 뜻에서 ‘GDP 대통령’, 경제에 올인하는 대통령이라는 뜻에서 ‘Put in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아예 대놓고 ‘짜르(황제)’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푸틴이 계속 집권한다면 별다른 변화 없이 계속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는 직장인 샤샤 루블료프의 얘기가 민심을 대변한다.

옐친 대통령 시절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떼돈을 번 올리가리히(Oligarich·신부유층)를 견제한다는 점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푸틴은 오일머니가 일부 부유층에만 가지 않도록 복지와 교육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1월 20일 출국일, 입국보다 수월하겠거니 믿었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2시간 반 전에 도착했지만, 표를 받는 데만 1시간 반 걸렸다. 안전검사에 30분 이상 더 기다린 뒤에야 비행기에 올라탔다. 기자보다 더 늦은 승객이 수두룩해 예정보다 30분 뒤에 떴다. 역시 꽉 찼다.

“경남 창원에 회의 참석차 간다”는 야나 마스테파노브에게 “러시아는 왜 이리 느리냐”고 불평해봤다. “한국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기에 “입국 수속은 1인당 1분이면 충분하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하는 변명. “새로운 직원이라 그렇지 절대 늦지 않다. 러시아도 달라지고 있다. 기사에는 좋은 얘기만 써달라.”

분명 러시아 경제는 뛰고 있었다. 그러나 공항 서비스가 말해주듯 관료주의, 시스템 미비, 고물가 등 해결할 과제도 쌓였다. ‘러시아, 러시아인’을 쓴 예일 리치먼드의 표현대로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모순의 나라다.

[취재 = 명순영 기자 / 사진 = 송은지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442호(08.02.6 · 13일자)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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