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76)을 수소문했다. 2009년 새해, 경제계 원로에게서 고언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만들고 IT 회사를 차린 벤처정신의 상징이다. 80년 서울 청계천에서 자본금 1000만원으로 시작한 삼보컴퓨터는 한때 연매출 2조원까지 성장했던 신화적인 기업이었다. 그의 창업정신 아래 한국은 디지털 강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닦았다.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 속, 한국 경제가 나아갈 길을 묻기에는 그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이 전 회장을 찾는 과정에서 처음 접한 직함은 의외였다.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IT업계 대부와 유교 관련 연구소 이사장이라니, 잘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인터뷰에 들어가면서도 한국 경제의 미래에 관한 조언을 들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유교와 디지털사회는 서로 동떨어진 공간에 있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은 “아무리 시대가 첨단을 달려도 모두 사람의 일”이라며 “IT 산업도 사람이 제대로 돼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신과 문명, 두 이슈에 대해 차근차근 얘기를 풀어나갔다.
요즘 근황이 궁금합니다.
저 스스로를 인성교육의 전도사라고 부르고 싶어요. 어른들, 특히 젊은 엄마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몰라요. 그래서 제가 교육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지요. 1000명이든 100명이든 5명이든, 수강생이 모이는 곳이라면 포항·고령·연천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찾아가 강의를 합니다. 지금 한국은 허겁지겁 달려오느라 균형을 잃어버렸어요.
이사장께서 생각하는 인성교육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제대로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저는 일삼십(1·3·10) 모델이라고 불러요. ‘일’은 인생의 목표를 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삼’의 의미는 살면서 세 가지를 잘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스스로 경영하는 법을 배우고 일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라는 겁니다. 이 각각의 교훈에 구체적으로 세 가지씩 지침을 다시 정하고, 거기에 효도라는 항목을 넣으면 모두 열 가지가 되지요. 이 열 가지만 잘 마음에 새겨도 좋은 인성을 가꿀 수 있을 겁니다.
저부터 먼저 돌아보면 자식을 길렀어도 체계적으로 어떻게 키워야 할지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그러다 손자를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겠다 생각했지요. 원칙만 설명했더니 제대로 설득이 되지 않아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고요. 젊은 엄마들은 인성교육에 매달리다 학교 공부에 뒤처지면 어쩌나 고민합니다. 그러나 인성교육은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한 달에 한 시간씩만 꾸준히 가르쳐도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날 겁니다.
이 이사장은 박약회라는 이름의 유림단체 회장이다. ‘지식은 넓게 행동은 예의 바르게’라는 의미의 ‘박문약례(博文約禮)’를 줄인 말이다. 전국에 20여개의 지회를 갖고 있고 회원이 4000명으로 적지 않은 단체다. 보통 유교 선양 단체는 족보를 만드는 등 ‘조상’을 챙기는 사업을 주로 한다. 하지만 그는 “조상만 챙길 것이 아니라 우리 사업, 우리 자손 사업을 해보자”고 주장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회봉사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10년 전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대화가 통하지 않는 현실을 고민하다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책도 냈다. 이를 수정 보완한 것이 2008년 선보인 ‘인성교육, 성적보다 먼저다’라는 책이다.
그는 경북 안동에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도 운영 중이다. 일반인과 학생을 대상으로 역시 인성교육을 하는 곳이다. 김병일 전 기획예산처 장관이 이사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왜 인성교육에 전념하시게 됐는지요.
강의를 할 때마다 ‘당신 남편이 언제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젊은 엄마들에게 묻지요. 학벌이 낮아서나 영어를 못해서라는 답변은 안 나옵니다.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거나 독단적이라서 등 인성에 관한 불평을 늘어놓지요. 부서장이 신입사원을 평가할 때 무슨 얘기를 할까요. 영어를 못한다라든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지 않아요. 일하는 태도가 올바르지 않다, 사람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적극적이지 않다 등 역시 인성을 논하지요. 그러니 성공하는 삶을 살려면 인성이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우리나라 발전 단계를 봐도 그래요. 한국이 급격히 경제성장을 할 때는 ‘잘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충성심, 또 부모를 생각하는 가치관이 바탕에 깔려 있었어요. 이런 정신이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해 짧은 시간에 높은 성장을 가져왔다고 봐요. 지금은 어떤가요. 소득 2만달러, 3만달러를 얘기하며 선진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공동체 가치관이 사라졌어요. 아파트에 살며 학원공부에 시달리며 경쟁에 치여 있는 학생들이 사회의 주축이 될 때 선진국에 갈 수 있을까요.
선진국이란 돈이 많고 국내총생산(GDP)이 높은 나라가 아니에요. 바른 사람,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내 삶의 주변에 많은 사회이지요. 인성교육을 등한시한다면 선진국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금은 풀뿌리 운동처럼 제가 하고 있지만 국가 차원에서 해야 한다고 봐요.
이 이사장은 아주 충격적인 얘기를 해줬다. 지인이 초등학교에서 특강을 할 일이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휴대전화, 강아지, 게임기 등이 쓰인 카드를 주고 배에 빠졌을 때 버려야 할 것부터 나열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70% 넘는 학생이 어머니를 게임기보다 먼저 버렸다. 할머니나 아버지는 이미 일찍 바다(?)에 던져졌다. 그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못되게 태어난 게 아니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퇴계학연구원을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퇴계 이황 선생의 일생을 연구하는 게 주 목적입니다만, 결국 도덕사회를 구현하자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유학을 깊이 있게 연구합니다. 유교의 핵심은 ‘수기치인(修己治人)’입니다. 자기를 먼저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서양 학문은 자기를 먼저 수양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지식 위주로 교육하죠. 고용된 선생이 상류층 자제를 가르치는 게 서구식 대학의 뿌리입니다. 이러니 제대로 된 인성교육이 발전할 수 없었죠. 지식만 가르치게 된 겁니다. 하지만 동양의 학문은 자신부터 돌아보라고 합니다.
금융위기를 두고 명문대 출신들의 전문가가 지식으로 만들어낸 위기라고 합니다. 영혼을 팔았다는 얘기도 나오고요. 이사장님의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듯합니다.
요즘 기업들은 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이익을 내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합니다. 또 이러한 행위가 전혀 비난받지 않지요. 미국 월가의 이런 행태가 세계에 위기를 불렀다고 봐야지요.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모든 게 옳은 것은 아닙니다. 경쟁 위주 시장경제의 문제점을 드러낸 것이지요. 맹자가 양나라 혜왕을 만났을 때입니다. 혜왕이 말했지요. “선생께서 천릿길을 마다 않고 우리 나라를 찾아주셨으니 우리 나라에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요?” 그랬더니 맹자가 이렇게 답했지요. “왕께서는 왜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과 의가 중요합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면 너무 이로움만 따져서는 안 됩니다.
CEO들이 새겨들을 말이기도 하네요.
MBA코스나 각종 최고경영자과정을 봐도 이익을 남기는 게 최고의 목표라고 말하지요. 하지만 단기성과보다는 기업이 공익에 부합한지 등을 고려해야 긴 안목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요즘에는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에 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정부 역할도 중요하다고 봐요. 기업은 아무래도 자기밖에 못 보니까 사회적으로는 공익에 저해할 수 있지요. 정부가 기업들의 이익추구를 방치했을 때 생길 문제는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할 겁니다.
요즘 은퇴 뒤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주요 사회 화두로 떠올랐다. 이런 의미에서 이 이사장은 모범 사례로 꼽힐 만도 하다. 인성교육 전도사로 나선 것부터 그렇다. 또 볼런티어21이라는 단체 이사장도 맡아 활동 중이다. 이 단체는 자원봉사 단체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리더 양성, 프로그램 개발 등에 주력하고 있다.
벤처 1호 기업이었던 삼보컴퓨터가 결국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때를 회고해보면 아쉬운 점이 많을 것 같군요.
제 자신의 얘기를 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만, 아쉬운 점이 있지요. 한전의 광케이블을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두루넷으로 통신망 사업에 뛰어들었지요. 당시 한전이 체신부(지금의 정통부)와 상공부(지금의 지식경제부)와의 힘겨루기 때문에 저를 끌어들였어요. 한전이 상공부 산하에 있었는데 체신부 영역인 통신사업이 불가능해지자 두루넷에 지분을 투자해 사업을 시작했어요. 당시 체신부나 통신공사(지금의
KT)는 사업이 잘 안 될 것이라고 했지만, 통신사업은 커졌고 가입자가 100만명을 넘어섰어요. 국내에서 유일하게 나스닥에 상장하기로 했고요. 이때까지는 좋았지요. 한때는 두루넷 시가총액이 현대자동차와
LG전자를 합친 것만큼 됐으니까요.
그러다 김대중 정부가 한전은 전력사업만 하라고 해 통신망을 안 깔아줬어요. 어쩔 수 없이 제가 1조원에 가까운 빚을 내 통신망을 깔았어요. 하지만 믿었던 한전이 파워콤을 설립하면서 갑자기 어려워지게 된 거죠. 한전의 망을 믿고 사업했는데 한전이 자회사를 갑자기 만들고, 또 정부는 이를 옹호하고 나서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된 거죠. 당시 삼보컴퓨터는 3000억원의 현금이 있었는데 두루넷 때문에 버틸 수 없었습니다. 당시 소송이라도 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다 지난 일입니다.
이 이사장은 삼보컴퓨터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도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나는 듯했다. 그래도 그는 한국에 컴퓨터를 처음으로 대중화시켰고, 두루넷으로 통신강국의 토대를 닦았다. IT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이끌었던 셈. 어쩌면 너무 빠르게 도입하려다 보니 빛을 못 봤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에게 “지금 사업이 될 만한 게 무엇이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허허” 웃었다.
한국의 성장동력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무슨 산업을 육성해야 할까요.
결국 IT 산업이라고 봅니다. 아일랜드가 유럽 최빈국에서 고소득 국가로 발전했고, 핀란드도 IMF 구제국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한국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성장동력은 IT가 될 겁니다.
인터넷도 좋은 분야입니다.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인터넷도 모멘텀이 필요한 시점이에요. 한국이 치고나갈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강조해온 ‘퓨처 인터넷(박스 기사 참조)’이 미래의 성장동력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용태 회장이 제시한 ‘국가 비전’]
■ ‘미래 인터넷’ 구축하면 세계 1위 가능
골드만삭스가 2025년이면 한국의 1인당 소득이 5만달러를 넘고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했다. 2050년이면 8만달러를 넘어 미국에 이은 2위가 된다. 이용태 이사장은 여러 번 읽은 듯 해진 골드만삭스의 보고서를 보여줬다. 그는 그 성장동력을 인터넷이라고 했다. 그냥 인터넷이 아닌 ‘미래(Future) 인터넷’이다.
그는 “현재의 인터넷을 대체할 미래 인터넷을 연구하고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이 인터넷에서 가장 강점을 갖고 있어서다.
구체적으로 보안이 보장된 정부 전산망 구축, 전 국토에 센서망 설치, 이러닝(e learning) 시스템 구축, 전자 홈닥터 시스템 등이다. 특히 국토 센서망에 관해 그는 “전 국토에 10만개만 설치하면 기상, 교통, 재해 등의 통제가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또 현재의 포털과 데이터마이닝 기법의 장점을 합친 인포메이션 디스커버리(Information Discovery·정보 탐색)를 개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사장이 예상하는 미래 인터넷 프로젝트 예산은 2조원이다. 그는 “2004년부터 2008년까지 고속통신망건설에 정부가 6000억원 투입했지만, 민간에서는 25조원을 투자했다”며 “이 프로젝트에도 민간기업이 많이 참여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인력 양성 방식도 혁신적이다. “기업이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4년간 교육을 시킵니다. 3년은 기업에서 일하고 1년은 학교에서 배우는 방식이지요. 학비와 생활비를 합하면 1인당 2억원이 들 겁니다. 1만명을 양성한다면 2조원이 소요되겠지만 국채를 발행하고 학자금 대출 등 제도를 잘 활용하면 정부 예산은 2000억원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 33년생 / 서울대 물리학 학사 / 미국 유타대 통계물리학 박사 / 이화여대 교수 / 한국데이타통신 사장 / 삼보컴퓨터 회장 / 두루넷 회장 / 퇴계학연구원 이사장 / 볼런티어21 이사장 / 숙명학원 이사장(현)
[대담 = 이제경 부장 / 정리 = 명순영 기자 / 사진 = 연수희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488호(09.01.07일자) 기사입니다]
RECENT COMMENT